전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아버지들께
이제서야 제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자식들만 생각하고 어머니의 고마움도 뒷전으로 두고 앞만 보고 정신 없이 내달리다가 문득 친구와 동생이 보내준 이메일들을 보고서야 제게도 아버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훌륭하신 아버지인 당신을 알아주는 한 아버지가 여기 있음을 그리고 훌륭하신 아버지 되심에 대한 자긍심을 드리기 위해 두 글들을 여기에 옮겼습니다.
아버지란 단어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 (직장)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 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실직한 아버지의 외로운 뒷모습
[한경비즈니스] 2006년 10월 30일(월) 오전 09:04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다. 등교 첫날 신입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입학식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는 등 이런저런 일로 왔다갔다 하느라 한자리에 계속 계시지 않았고, 누군가가 맨앞의 어린이에게 학급을 표시하는 깃발을 잡고 있도록 했다. 어린 마음에 깃발을 잡고 있는 게 감투를 쓰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서로 앞다퉈 깃발을 잡으려 했고 힘센 아이가 깃발을 빼앗아 잡고 있으면 뺏긴 아이는 고학년인 형을 데리고 와서 다시 깃발을 빼앗아 잡고 있기도 했다. 바로 그때 아버지께서 나타나 깃발을 빼앗아 필자에게 주셨고 아버지 덕에 끝까지 깃발을 잡고 있을 수 있었다.학년이 바뀌어 2학년이 되자 선생님이 교실에서 새 책을 나눠주셨는데 그때도 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 선생님을 도와 책을 나눠주셨다.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필자에게 아버지는 참으로 든든한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당시 20대이던 둘째 형이 독일에 광부로 떠났고 곧이어 셋째 형도 떠난 뒤에야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그 이유가 아버지의 이른 실직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필자에게 아버지는 애정은 있지만 무능하고, 소득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낮이나 밤이나 온갖 행상으로 7남매를 기르시는 어머니와 늘 다투기만 하시는, 가족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특히 술을 드신 날이면 어머니와 심한 다툼을 하셨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3남매 (형들이 이런저런 일로 외지로 떠나 당시 집에는 3남매만 있었다)에게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도움은커녕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괴롭히기만 하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었다. 자연히 우리 3남매는 늘 어머니 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광주로 온 가족이 이사하는 과정에서 잠시 전남 화순 집에 아버지만 홀로 계신 적이 있다. 밤에 잠시 무언가를 가져가기 위해 화순 집에 들렀는데 아버지께서 취한 상태로 방에 홀로 누워계시다가 고개를 돌려 필자를 발견하곤 ‘막둥이 왔냐’며 힘없이 물으셨다. ‘네’ 하고 나오려던 순간 저녁은 드셨는지, 왜 혼자 누워 계시는지, 쌀쌀한 가을 저녁이었는데 방은 따뜻한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날따라 너무나 쓸쓸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모습을 뒤로한 채 냉정하게 돌아서 나오고 말았고, 20여년이 지난 요즘도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슬픔이 복받쳐 운전하다가도 눈물을 훔치게 되고,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이 흘러 몇 번씩 모니터가 흐려진다.
그 때는 도무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셨는지, 왜 시름을 술로 달래셔야만 했는지, 술을 드시면 왜 그렇게 가족들을 힘들게 하셨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를 보내면서 넉넉지 못한 형편에 소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이 어려우셨고, 남자의 자존심상 그런 자신의 모습을 용납하기 싫어 술로 달래셨고, 그 순간에는 억제돼 있던 한탄이 어머니에게 쏟아지면서 두 분이 다투셨고, 불쌍한 어머니를 도와주시지는 못할망정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에게도 외면을 받으신 건 아닐지….
얼마 전 <사장으로서 산다는 것>이란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장님들이 자신만의 고통을 끌어안고 힘들게 살아가는 순간들이 정말로 많다고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힘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수많은 비애들이 필자의 아버지께서 실직 후 돌아가시기까지 20여년을 보내면서 느끼셨던 절망감보다 더 클까?필자는 다행히도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뜰 때 회사에 출근한다는 생각을 하면 매번 행복하지는 않을지언정 괴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오히려 즐거운 편이다.
이제 40대 초반에 불과한 터라 아직 세상에서 할일이 무척 많다고 생각한다. 설혹 남은 인생에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딸이 훗날 불쌍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기억하길 소망하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글 / 박환승1964년생으로 87년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온미디어 전략지원본부 기획국장을 지냈고,
2004년부터 산업기술인터넷방송국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제서야 제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자식들만 생각하고 어머니의 고마움도 뒷전으로 두고 앞만 보고 정신 없이 내달리다가 문득 친구와 동생이 보내준 이메일들을 보고서야 제게도 아버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훌륭하신 아버지인 당신을 알아주는 한 아버지가 여기 있음을 그리고 훌륭하신 아버지 되심에 대한 자긍심을 드리기 위해 두 글들을 여기에 옮겼습니다.
아버지란 단어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 (직장)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 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실직한 아버지의 외로운 뒷모습
[한경비즈니스] 2006년 10월 30일(월) 오전 09:04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다. 등교 첫날 신입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입학식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는 등 이런저런 일로 왔다갔다 하느라 한자리에 계속 계시지 않았고, 누군가가 맨앞의 어린이에게 학급을 표시하는 깃발을 잡고 있도록 했다. 어린 마음에 깃발을 잡고 있는 게 감투를 쓰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서로 앞다퉈 깃발을 잡으려 했고 힘센 아이가 깃발을 빼앗아 잡고 있으면 뺏긴 아이는 고학년인 형을 데리고 와서 다시 깃발을 빼앗아 잡고 있기도 했다. 바로 그때 아버지께서 나타나 깃발을 빼앗아 필자에게 주셨고 아버지 덕에 끝까지 깃발을 잡고 있을 수 있었다.학년이 바뀌어 2학년이 되자 선생님이 교실에서 새 책을 나눠주셨는데 그때도 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 선생님을 도와 책을 나눠주셨다.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필자에게 아버지는 참으로 든든한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당시 20대이던 둘째 형이 독일에 광부로 떠났고 곧이어 셋째 형도 떠난 뒤에야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그 이유가 아버지의 이른 실직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필자에게 아버지는 애정은 있지만 무능하고, 소득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낮이나 밤이나 온갖 행상으로 7남매를 기르시는 어머니와 늘 다투기만 하시는, 가족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특히 술을 드신 날이면 어머니와 심한 다툼을 하셨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3남매 (형들이 이런저런 일로 외지로 떠나 당시 집에는 3남매만 있었다)에게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도움은커녕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괴롭히기만 하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었다. 자연히 우리 3남매는 늘 어머니 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광주로 온 가족이 이사하는 과정에서 잠시 전남 화순 집에 아버지만 홀로 계신 적이 있다. 밤에 잠시 무언가를 가져가기 위해 화순 집에 들렀는데 아버지께서 취한 상태로 방에 홀로 누워계시다가 고개를 돌려 필자를 발견하곤 ‘막둥이 왔냐’며 힘없이 물으셨다. ‘네’ 하고 나오려던 순간 저녁은 드셨는지, 왜 혼자 누워 계시는지, 쌀쌀한 가을 저녁이었는데 방은 따뜻한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날따라 너무나 쓸쓸하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의 모습을 뒤로한 채 냉정하게 돌아서 나오고 말았고, 20여년이 지난 요즘도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슬픔이 복받쳐 운전하다가도 눈물을 훔치게 되고,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이 흘러 몇 번씩 모니터가 흐려진다.
그 때는 도무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셨는지, 왜 시름을 술로 달래셔야만 했는지, 술을 드시면 왜 그렇게 가족들을 힘들게 하셨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를 보내면서 넉넉지 못한 형편에 소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이 어려우셨고, 남자의 자존심상 그런 자신의 모습을 용납하기 싫어 술로 달래셨고, 그 순간에는 억제돼 있던 한탄이 어머니에게 쏟아지면서 두 분이 다투셨고, 불쌍한 어머니를 도와주시지는 못할망정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에게도 외면을 받으신 건 아닐지….
얼마 전 <사장으로서 산다는 것>이란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장님들이 자신만의 고통을 끌어안고 힘들게 살아가는 순간들이 정말로 많다고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힘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수많은 비애들이 필자의 아버지께서 실직 후 돌아가시기까지 20여년을 보내면서 느끼셨던 절망감보다 더 클까?필자는 다행히도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뜰 때 회사에 출근한다는 생각을 하면 매번 행복하지는 않을지언정 괴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오히려 즐거운 편이다.
이제 40대 초반에 불과한 터라 아직 세상에서 할일이 무척 많다고 생각한다. 설혹 남은 인생에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딸이 훗날 불쌍하신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기억하길 소망하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글 / 박환승1964년생으로 87년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온미디어 전략지원본부 기획국장을 지냈고,
2004년부터 산업기술인터넷방송국의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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